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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경제 9/14] [CEO & 매니지먼트]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 운수업 하다 펑크 잦자 등록일2010-10-21

40년 외길 달려 2조 기업 키워낸 '타이어 姜'

거창한 경영이론서는 가라

진심 다하면 제조업은 배신 안해…유언장엔 '한우물 파 전문화하라'

역발상 경영 40년

모두 외면하던 우성타이어 인수…창녕에 1조2천억 공장 '통 큰 투자'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71)은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건강한 혈색과 다정다감하면서 분명한 어투는 50대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스스로 기업을 일으켜 성공한 경영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과 몸에 밴 부지런함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강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던 1967년 화물운수회사인 옥정산업을 설립하며 기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모회사 넥센과 넥센타이어 넥센테크 넥센산기 KNN(부산 · 경남지역 민영방송) 등 관계사들의 총 매출액은 2조원을 넘본다. 당대에 기업(起業)에 나서 중견 '제조'그룹으로 키워낸 흔치 않은 주인공이다.

그는 스스로 제조업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제조업은 정직하다고 했다. "제조업이 좋은 것은 경영자가 한눈팔지 않고 공장에 들어앉아 있으면 답이 보이게 돼 있다는 데 있지요. " 직원들과 함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을 지키면서 진심으로 품질을 높이려고 애쓰면 길은 열리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강 회장은 경남 창녕에 무려 1조2000억원을 들여 최신 타이어 공장을 짓고 있다. 고부가가치 친환경 타이어를 생산하기 위한 설비다. 너도나도 값싼 인건비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마당에 어지간한 대기업도 혀를 내두를 만한 돈을 국내에 투자키로 결정했다. 주변에서 다들 '놀랍다'고 했다. 그는 "중국 쪽 임금이 조금 싸지만 불량률이 국내보다 높아요. 결국 우리가 하기 나름이고,국가적으로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라며 덤덤해했다. 고희(古稀)를 넘긴 강 회장의 새로운 도전이다.

◆뭐든 잘하면 성공한다

강 회장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마산고와 동아대 법대를 나왔다. 진주는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 LG 등의 선대 회장들이 태어난 곳이다. 그곳의 정기를 받은 덕분인지 그는 큰 어려움 없이 기업가의 길을 선택했다. "잠깐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곧 '나의 인생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법관을 지낸 조무제 동아대 석좌교수와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만 길이 달랐어요. "

그의 사업은 운명처럼 시작됐고 거침없이 번창했다. 결혼과 함께 일본에 살던 처가 쪽 기업인을 알게 되면서 중고트럭 수입의 문이 열렸다. 마침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로 각종 골자재 수송을 위한 덤프 트럭 수요가 엄청났다. 중고트럭 수입 · 판매가 일사천리로 풀릴 즈음 그는 직접 운송사업을 해보기로 하고 옥정산업을 세웠다. 3~4년 만에 지입차를 포함해 회사차가 800대를 넘어설 만큼 규모가 커졌다.

강 회장은 그 무렵 일본 출장길에 좁은 골목을 누비던 소형 삼륜차를 눈여겨봤다. "작은 짐을 운반하는 데 유용할 것 같아 소형 오토바이를 만들던 기아산업에 앞바퀴 하나에 뒷바퀴가 두 개인 용달차(用達車) 아이디어를 주고 이를 개발하게 했지요. 나이든 분들은 다 알겠지만 말 그대로 대박이 났어요. 용달차라는 말도 내가 만든 거예요. "

'용기를 내서 하면 된다. 뭐든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큰 밑천이었던 때였다. "물론 열심히 했지만 시절이 좋았고 운도 따랐어요.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도 지금과는 달랐죠.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하면 새롭게 할 수 있었지요. " 선배 기업가로서 강 회장은 "젊음을 믿고 용기를 내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가 아쉬운 요즘"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제조업 체질이다

운수업을 하면서 타이어의 잦은 펑크로 고심하던 강 회장은 튼튼한 타이어를 만들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흥아타이어 재생공장이 매물로 나왔다. 관청을 오가는 일이 많았던 운수업보다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면 되는 제조업에 매력을 느끼던 참이라 주저없이 사들였다.

1973년 흥아타이어공업(현 ㈜넥센)을 세웠고 해외시장에서 '타이어 강'으로 불리는 그의 타이어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 타이어 회사들은 타이어와 튜브를 같이 만들었는데,우리는 튜브 전문 회사로 특화했지요. 운이 좋아서인지 곧 다른 회사들이 튜브 생산을 접고 우리 것을 사다 쓰기 시작했고,자신감이 생기자 중동 수출에도 나섰지요. "

강 회장은 일본 기술을 이전받아 품질을 높인 뒤 일본에 이어 미국시장에도 진출해 성공했다. 세계 최고의 튜브 제조사로 도약한 ㈜넥센은 자동차 튜브만으로 1억달러 수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튜브 없는 타이어가 등장하면서 사양길을 걷던 튜브에 특화하는 승부수로 제조업의 기반을 닦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3월 우성타이어(현 넥센타이어) 인수는 기업가 강병중이 던진 승부수의 절정이었다. 당시 법정관리를 받던 우성타이어는 많은 부채와 낮은 생산성 등의 문제로 다른 국내 기업들은 외면했다.

강 회장은 공장을 한 번 둘러본 뒤 성공을 확신하고 인수를 결정했다. "우성타이어 인수는 큰 도전이었지만,공장을 둘러보면서 수익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열심히 하려는 진정성이 있으면 바꿀 수 있다고 봤습니다. 회사 인수 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리고,대신 효율을 높이는 일에 나섰더니 직원들이 마음을 열었고 회사도 금방 좋아지더군요. "

우성타이어는 강 회장이 인수한 이듬해인 2000년 넥센타이어로 이름을 바꾸며 매출 2064억원에 순익 242억원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매출 9662억원,순익 1622억원의 최고 실적을 냈고,올해는 매출 1조원 기업으로 도약을 앞두고 있다.

그는 운도 좋았다. 주위에서는 운을 부르는 그의 능력을 부러워한다. 사실 외환위기 직전 제일투신 및 경남생명 지분과 유휴 부동산을 매각해 우성타이어 인수를 위한 실탄을 만들 수 있었다. "매각 타이밍이 절묘했기 때문에 다들 부러워했지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 아니라 더 이상 갖고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강 회장에게 '골프장 안 하냐'고 물었더니 "안그래도 주변에서 사달라는 얘기 많이 듣는데, 비싼 돈 주고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넥센은 빅야드 브랜드의 골프공을 생산하고 있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호텔에 관심 갖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다는 질문엔 "서울에서 수익 내는 호텔이 몇 개나 되느냐"며 "절대 안 한다"고 손사래쳤다.

"경남 창녕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글로벌 10위권 타이어 업체로 도약하게 됩니다. 이쪽 분야에서 더 나은,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지요. " 그는 아들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에게 '한 우물을 파면서 전문화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유언으로도 남길 것이라고 했다. 40여년 기업인의 길을 걸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회사를 이만큼 성장시켜낸 비결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판 덕분'으로 꼽았다. 또 사람을 중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의 삼성도 인재 제일주의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전문 경영인인 이현봉 부회장과 함께 넥센타이어를 이끌고 있는 강호찬 사장 얘기를 하면서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잘하고 있지 않나요? 넥스트 센추리(next century)를 뜻하는 회사명 넥센처럼 앞을 내다보고 잘 준비하는 것 같은데…."

그는 "넥센히어로즈를 통한 프로야구 메인스폰서 참여가 국내에서 기업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강 사장 작품이지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강 회장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1994년부터 2002년까지 3연임하며 삼성자동차와 한국선물거래소의 부산 유치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 경제계에서도 신망이 높다. 그는 "외도 아닌 외도를 하게 된 것은 지역경제 기반을 넓히려는 노력을 누군가는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수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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